뱀파이어의 초상화

portrait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머리는 어깨와 허리사이 만큼 길다는 건 안다. 약간 곱슬이고 자르지 않는다면 이 상태를 평생 유지할 것이다. 피부는 약간 까무잡잡한 편이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뱀파이어로 살기 위해 그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지 하면서도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화장대 거울에 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는 화장도 제대로 할 수 없잖아…’
나는 립스틱만 대충 바르고 눈 주위를 검은 아이쉐도우로 커버했다. 오늘 밤은 왠지 밖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냉장고에 남은 혈액 팩은 단 두 개 뿐. 그것도 한 달이 넘은 것들이다. 최소한 스무 개는 있어야 안심인데 말이다. 옷장 문을 열어봐도 입을 옷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엉덩이에 꽉 끼인 핫팬츠와 배꼽티셔츠를 입고 밖을 나섰다. 머리를 뒤로 묶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영원히 열 아홉 살 여자 아이로 남아 있는 뱀파이어다. 시끄러운 음악은 질색이지만 클럽 V로 가야한다. 살고 싶다면.

클럽 V, 새벽 1시

오늘 밤은 아무도 걸려들지 않는다.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바보도 없다. 플로어에 손님이 딱 두 명, 그것도 여자 뿐이다. 새벽 한 시가 되자 여자 둘은 자리를 떠 버리고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서른 후반. 172 센티미터. 78 킬로그램. 야근을 하다가 막 달려나온 사람처럼 후줄근한 양복차림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내 옆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서른 넷이야, 너는?”
거짓말. 사람들은 왜 젊어 보이려고 할까?
“맞춰봐. 보기보다 많아. 다들 깜짝 놀라.”
내가 반말을 하면 남자들은 좋아한다. 남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걱정 마. 미성년자는 아니라고. 우리는 쓸데없는 몇 마디를 나누었다. 남자가 이름을 말해줬는데도 음악소리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은행에 다니고 있으며 아직 미혼이다. 취미는 그림을 그리는 것.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
“너는 학생?”
“아니, 옛날에 그만뒀어. 지금은 뱀파이어야.”
그는 웃었다. 그는 누굴 만나기 위해서 가끔 이곳에 온다고 했다. 나는 목이 마를 때 마다 이곳에 온다고 답했다.
“저기 부탁이 하나 있는데… 화장실에 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여기 화장실이 좀 무서워서 말이야.”
나는 윙크를 살짝 보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200 cc

80 킬로그램. 남자는 생각보다 무겁다. 겨우 그를 변기에 앉혀 놓고 바늘을 꺼냈다. 15게이지는 약간 아프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건장한 남자니까 괜찮을 것이다. 나는 주사기로 약 200cc 정도의 피를 뽑았다. 급한 김에 주사기를 입에 넣고 맛을 보았다. 이 남자, 담배와 술을 좀 줄여야 할 것 같다. 아쉬운 대로 갈증은 해결 되었지만 피를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목에 있는 핏줄이 팔딱, 하고 뛴다. 절대로 사람을 물면 안 된다. 이건 클럽V의 룰이다. 그러나 그의 목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메모지를 한 장 그의 셔츠에 넣었다. 지갑을 뒤져 명함을 훔친 뒤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문자를 보낸 89시간 뒤

‘어제 클럽에서 만난 뱀파이어입니다. 저녁에 시간되시면 우리 집에 놀러와요. 심심해요.’
이럴 때엔 보통의 남자라면 여섯 시간 내에 연락이 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89시간이 걸렸다. 바빠서 문자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단다. 진짜로 바쁜 건지 나를 피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피를 200cc 정도 마셔보면 그 사람의 성격 같은 건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남자는 좀 달랐다. 캔버스에 짙은 회색으로 배경을 두껍게 칠한 느낌이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미치도록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는 것 뿐이었다. 은행에 근무하며 매일 밤까지 이어지는 숫자놀음 때문에 그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그가 집에 오자마자 나는 다짜고짜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커다란 스케치북과 연필을 미리 사 두었다.
“되도록이면 똑같이 그려줘. 화풍이나 개성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그는 4B 펜을 받아들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제일 어려운데.”
움직이지 않는 게 제일 어려웠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몸의 한 구석이 가려워져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방 안은 슥삭 슥삭 스케치를 하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의 눈은 광채를 띄기 시작한다. 두 시간 만에 그는 탈진해버렸다.
“미안. 오늘은 여기까지. 오랜만에 그림을 그렸더니 너무 피곤한걸. 좀 누워 있다가 다시 그려줄게.”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한다.
“그럼. 쇼파에 누워 쉬고 있어.”
수면제가 들어간 커피를 마셨으니 당연히 잠이 다. 쇼파에 앉자마자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체혈기를 옮겼다.

5000cc

사람의 몸에 들어 있는 피는 대략 5000cc 정도다. 그 피는 온몸을 돌면서 생명력을 전달한다. 남자는 올 때마다 그림을 조금씩 완성 시키고 나는 피를 조금씩 뽑았다. 그는 완성되기 전에는 그림을 보여주기 싫어했다. 남자가 돌아간 사이 스케치북을 볼 수 있지만 참기로 했다. 기다림 끝에 얻는 쾌락은 큰 법이니까. 남자는 내 방을 나갈 때마다 나의 자화상은 조금씩 완성되었고 남자는 조금씩 수척해졌다.
합해서 5000cc 정도의 피를 뽑았을 때 그림이 완성되었다. 횟수로는 열 두 번 정도가 되고 시간상으로는 석 달이 넘게 걸렸다.  그는 예전의 피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그림을 건네며 말했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던 여자를  만난 적이 있어. 그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클럽에 갔는데 당신을 만났지 뭐야.”
라디오의 애청자 사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림을 빨리 보고 싶을 뿐이라고. 그는 스케치북을 내게 건넸다. 나는 천천히 표지를 펼쳤다.
그런데…이건 뭘까? 긴 머릿결도 비슷하고 체형도 나와 비슷한 여자가 그려져 있다. 배경은 알록달록한 풀이 무성한 숲 속이다. 아마도 테이블에 있던 화분을 과장해서 그려 넣은 것 같았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마치 투명 인간처럼 텅 비어 있었다.
“지….지금 장난치는 거야? 얼굴이 없잖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쉼 호흡을 해보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뭐라고? 자세히 봐, 짙은 눈썹, 오똑한 코, 약간 두터운 입술…여기 다 그려져 있잖아.”
그는 그림 속의 텅 빈 얼굴에 눈, 코, 입이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짚은 곳은 뻥 뚫려버린 얼굴 뒤에 있던 나뭇잎이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목덜미의 핏줄이 불뚝 튀어 나왔다. 나의 손은 어깨에서 등으로, 가슴으로, 다시 그 아래로 내려간다.
“당신이 그린 그림은 최악이야. 재능이 없어. 화가가 되었다면 굶어죽었을 걸. 평범한 회사원이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해. 계속 살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 Self Portrait as the Lost Coast, Erika Somogyi

Confuzed & Dazed 20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