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로운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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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고 반년을 집에서 빈둥거렸더니 엄마의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취직할 생각이 없으면 집안일이라도 하란다. 엄마가 대신 파출부나 나가게.
인터넷으로 알바자리를 구해보았다. 편의점이나 커피숍 알바 자리도 몇 군데 넣었지만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그냥, 집에서 놀면 안 되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만 읽으면서 평생을 지내도 상관없는데. 이런 말을 하면 또 잔소리가 쏟아지겠지. 고등학교 때 학원에 보내고, 비싼 대학등록금을 들여 졸업시켜 놓았더니 고작 하는 게 그런 말이냐고. 세상으로 나가기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어떡해?
휴우.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다 이상한 채용광고를 발견했다.
제목 | 메이드 구함
자격요건 | 메이드 복이 잘 어울리는 용모 단정한 여자
하는 일 | 소소한 잡무
급여 | 상의 후 결정
변태 오타쿠가 올렸나 싶었지만 재미삼아 구직신청서를 넣었다.
다음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나긋나긋한 중년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자는 위치와 시간을 말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뭔가 물어볼 시간도 주지 않고서 말이다.
그날 오후 면접을 보러 갔다. 수상쩍은 곳에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지만 여자의 목소리에 어쩐지 신뢰가 갔다. 엄마에게 면접을 간다고 문자도 넣어뒀다. 사무실은 강남 대로변의 고층 오피스텔의 1706호.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전화를 건 여자 뿐이었다. 서른 평은 족히 되는 공간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목 책상과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노트북 하나 뿐. 여자는 커피를 한 잔 내왔다. 보라색 꽃이 그려진 고급스런 찻잔이었다.
“다들 장난인 줄 알고 지원을 하지 않더군요. 약속을 잡아 놓고도 어기는 사람도 많고. 자기 소개서가 맘에 들었어요. 영문학과를 졸업한 것도 맘에 들고.”
자기소개서에 뭐라고 적었더라? 예전에 작성한 것을 훑어보지도 않고 보냈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영문학과를 나왔다고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면 큰일인데. 나, 외국인이 길을 물어보면 도망치기 바쁘다고.
여자의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염색을 하지 않아 회색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보였다. 저런 머리는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드러내놓기 힘든데.
“정확히 하는 일이 무엇이죠?”
“말 그대로, 소소한 잡무에요.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서 청소를 하고, 열시 쯤 제가 오면 커피를 내 주면 되요. 가끔씩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심부름도 하고…. 일은 두 시 쯤 마쳐요.”
여자는 차를 마시면서 나를 천천히 훑어봤다. 여자의 눈이 닿는 곳마다 부끄러워졌다.
“이곳은 무얼 하는 곳이죠?”
“제 개인 작업실이에요. 시나리오를 쓴답니다.”
시나리오 작가? 개봉한 영화를 물어보고 싶은데 어쩐지 실례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왜 메이드 복을 입어야 하는 거지요?”
여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듯도 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거든요. 누군가가 옆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잘 써지는 버릇이 있어서… 작년까지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는데, 늘 어머니가 옆에서 집안일을 하고 계셨지요. 방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글을 쓰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메이드 복을 입고 일을 하는 내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묻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죄송해요. 괜한 걸 물어봐서.”
그렇구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일을 방해하는 코스프레를 찾는 여자의 사정이 안쓰러워졌다.
“괜찮다면, 내일부터 일해주실 수 있나요? 지금 원고 마감이 급한 작업이 있어서요.”
급여조건은 편의점 알바보다 시간당 두 배 정도였다. 일도 어렵지 않다. 오케이.
다음날 여덟시 삼십분에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옷장을 여니 메이드 복이 다섯 벌 걸려 있었다. 사이즈가 약간씩 달랐다. 깨끗하게 세탁을 해 놓았지만 누군가가 입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55 사이즈 정도로 되어 보이는 메이드복을 꺼냈다. 조금 끼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흰색 레이스가 가슴과 앞치마 쪽에 달려 있고 치마는 생각보다 짧았다.
아래쪽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이런, 스타킹과 가터벨트가 나온다. 안쪽 깊숙한 곳을 뒤지니 가죽 채찍까지 있다.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이 여자, 도대체 무슨 일을 도와주는 메이드를 구하고 있는 거야? 나는 거실 한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갔다. 알아내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여자의 노트북을 켜는 것이다.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알면 힌트를 얻을지도 모른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는 한참을 덜그덕 거리다가 윈도 화면이 떴다.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야? 바탕화면의 워드 프로세서를 실행시키고 최근 파일을 열었다. 제목은 ‘뱀파이어의 초상화’ 오호 한 번 읽어볼까? 바로 그 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