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정체성과 나의 구운 달걀

나는 구운 달걀을 세 개째 까먹고 있다, 그녀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구운 달걀은 삶은 달걀과는 달리 소금에 찍어먹을 필요도 없이 짭짤하고 쫀득쫀득하다. 편의점에 담배나 맥주를 사러 갈 때면 계산대에 있는 두개 들이 구운 달걀을 꼭 사온다. 맥주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달걀 껍질은 책상위에 쌓여져만 간다. 내가 먹고 버린 구운 달걀의 껍질을 모은다면 얼마나 될까.
지난 주말 그녀의 입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그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 사람의 입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을 들어본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처음인 것 같았다.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의 붕괴.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겠지.
“너를 만나는 동안 나의 정체성은 천천히 소멸되어 갔어.”
그녀가 말했을 때 나는 학교 식당에서 구운달걀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것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되물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녀를 잡고 싶거나 울며 매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녀와 나와의 사이는 친한 선후배와 애인의 중간지점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으니까. 쉽게 말하자면 서로 영화도 보고 술도 마셨지만 아직 키스는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쩐지 그녀와는 그 이상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입학할 때부터 같은 과 선배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을까? 너무 편해서였을까? 사귀자고 한 쪽도 그녀고 화를 내고 있는 쪽도 그녀였다.
“미안하지만 당분간 만나지 말았으면 해. 전화도 하지 마.”
그녀는 심각하게 말했다.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나는 꾹 참고 달걀을 먹었다. 그 날의 첫 번째 달걀이었다. 나는 “응” 이라는 짧은 대답만을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의 정체성은 어떤 이유로 소멸되었을까. 달걀 껍질처럼 쉽게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닐텐데…
일 주일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주치지 않았다. 수업이 같은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어떻게든 한 번씩 마주치는데 말이다. 학교 식당이나 도서관, 서점에도 그녀는 없었다. 정말 소멸 되었나?
휴대폰이 울린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구운 달걀을 먹고 있었다. 음악을 굉장히 크게 틀어 놓고 있어서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의 전화번호다. 나는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누른다.
“나야. 잘 있었어?”
나는 입 속의 계란을 씹느라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하며 지냈어. 나하고 계속 만나고 싶다면 한 가지 약속을 해줬으면 해.”
그녀는 나의 의향 따위는 무시한 채 내가 그녀를 계속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제로 말을 꺼낸다. 꼬치꼬치 캐묻기가 피곤해서 그냥 대답한다.
“그게 뭔데?”
마침내 달걀을 다 먹었다. 테이블에 놓여진 콜라를 벌컥 벌컥 들이킨다.
“내 앞에서 달걀을 먹지 말아줘. 그럼 너와 계속 만나겠어.”
이게 무슨 말인가. 입안의 콜라를 푸하고 뿜어버릴 뻔 했다. 나의 구운 달걀과 그녀와의 만남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해 못하겠는데. 달걀하고 너하고 계속 만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설명을 좀 해줄 수 있을까?”
“넌 늘 내말을 듣는 척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달걀을 먹고 있었을 뿐이야. 제대로 듣지도 않으면서. 아마 지금도 달걀을 먹고 있을걸.”
“아..아냐.”
나는 입 주위의 계란 노른자를 털어낸다.
“지난 번에 내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던 거야?”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달걀을 먹었던 것 같다. 아, 전에도 한 두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미처 내가 달걀을 까서 먹는다는 자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면 자연스럽게 나는 달걀을 먹는다. 노른자까지 다 먹으면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간다. 껍질을 치우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몰라. 그게 싫으면 달걀을 먹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해.”
“사과는 받아드리겠어.”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녀는 구운 달걀에 질투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늘 관심과 배려에 목말랐을 뿐. 하지만 나와 만나면서 그녀의 정체성이 어떻게 소멸되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해 범위를 훌쩍 벗어나 버렸다. 테이블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달걀 껍질을 손으로 한곳으로 모은다. 그리고 달걀껍질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나는 문자를 보낸다.
< 잠시만 기다려. 집 앞으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