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나를 갈구는 상사의 비밀

bimil

직장생활 10년차에 별의 별 경험을 다 해봤지만, 제일 힘든 건 인간관계다. 일이 많으면 밤을 새면 되고 서툰 일은 눈치코치 배워가면서 해내면 되는데, 인간관계는 미묘해서 해결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특히 상사 눈에 잘못나면 그 상사가 다른 부서로 가거나 잘리기 전까지는 악몽까지 꾸게 된다.
나와 김부장과의 악연은 3년 전 쯤으로 올라간다. 업무상 외국에서 전송되는 서류를 처리해야 할 때가 많은데 김부장이 잘못 읽은 단어를 ‘그게 아니라….’ 로 딴지를 걸어 정확한 발음을 말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바보 같이 내가 왜 그랬을까?
이후로 김부장은 은근히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 ‘이런 건 김민정씨가 잘 알겠네’ 라며 엄청난 분량의 해외서류를 떠맡기는 것은 기본이요, 술자리에서도 은근히 나를 멀리하며 신입 여사원들과 히히덕거리는 것이다. 마치 저렇게 노처녀로 회사에 남으면 안 돼,라고 속삭이듯이. 어이, 당신이야 말로 사십대 중반의 노총각이라는 걸 잊지 마. 머리도 반 쯤 벗겨졌잖아. 날 모함한 적은 없으니까 넘어가주자, 라고 맘 편하게 먹으면 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매일 느끼한 걸 먹어 소화되지 않는 기분으로 회사를 다녔다. 김부장이 나타나는 악몽도 꿨다. 여고생으로 돌아갔는데 김부장이 학생주임으로 등장해 몽둥이를 휘둘렀던 거다. 악!
그런데….어느 날 김부장과의 모든 트러블이 한꺼번에 풀리는 일이 생겼는데….
회의실에서 김부장과 단 둘이 미팅을 하다가 그가 화장실을 간 사이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테이블에서 진동으로 울리는 폰을 받을까 말까 하다가 에엣, 하면서 받았다. ‘여보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쪽에서 먼저 말을 했다.
“당신 회사 맞은편 커피숍에 있어. 지금 당장 안 나오면 회사로 갈테니 그럴 줄 알아.”
딸깍 하고 전화가 끊겼다. 목소리는 20대 후반의 여성. 휴대폰에 뜬 이름은 선미. 이렇게 저렇게 보나 김부장의 숨겨놓은 애인인 것이 분명했다. 하하. 특종. 특종. 김부장이 여자를 사귀고 있었어? 그것도 스무살 차이가 나는? 아니지, 이 여자 애가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어.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김부장. 나는 그의 핸드폰을 잡고 바이바이 하는 것처럼 흔들었다.
“아주 급한 사정이 있는 예쁜 여자분이, 요 앞에서 김부장님을 기다린데요.”
그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전화기를 뺏고,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나는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김부장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뭐야 이사람, 사장님이라도 나타나면 뭐라고 변명하라고. 못살아. 퇴근시간이 되었는데도 김부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낮의 정사라도 치룬 걸까? 아니면 김부장이 변심한 애인에게 해코지라도 한 게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 시간쯤 그를 기다리다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김부장이 걱정되긴 했지만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의 하얀색 소나타가 보였다. 짙게 선팅해 놓은 차 안에 검은 그림자가 있다. 틀림없이 누가 있다! 뚜벅 뚜벅 차로 걸어가니 김부장이 운전석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툭툭하고 쳤다. 그는 흘끔하며 나를 쳐다보더니 뜸을 한참 들인 뒤에 창을 내렸다.
참으로 가관인 것이, 나이가 오십이 가까운 남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란… 하.하.하 웃어줘야 했으나 왠지 측은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한 잔 어때요? 연애는 제대로 못해도 연애 상담은 박사라구요.”
김부장은 대답 없이 조수석을 딸깍 하면서 열어주며 시동을 켰다.
일을 하는 건 어차피 사람이다. 아무리 이윤을 위해서 냉철하게 일을 해야 하는 곳에서도 그 일을 하는 건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인 것이다. 일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업무로 가치가 판단되는 경우가 있는데, 일을 엉망으로 하는 사람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경우도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고, 같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물론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무튼 그 날, 나는 김부장의 아주 개인적이고 불완전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 이야기는 한마디도 해줄 수 없다. 사실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 이런 저런 이용을 당하다가 차인 남자의 이야기.
그 날 이후, 김부장이 그 여자와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는 여전히 날 갈구었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것이 불쾌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업무적으로 심한 일을 시키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그는 매사에 완벽한 일처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나 이외의 모든 부하직원도 혀를 내밀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가 밉지는 않다. 더 이상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