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티브이가 없다. 돌이켜 보니 부모님과 함께 살 때를 빼놓고는 티브이가 계속 없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놀러 가면 티브이를 틀어 놓고 넋 놓고 본다. 예전에는 서너 개 공중파만 본 것 같은데 요즘에는 채널도 많고(다 돌리는 데만 한 시간은 걸리는 것 같다), 광고도 많고(보험과 대출), 새로운 드라마도 많다. 채널을 돌리다 결국에는 드라마에 멈추게 된다. 왜냐 하면 화면을 꽉 채운 주인공들이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대사를 읊기 때문이다. 어쩐지 봐주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중간부터 보는 드라마라 배우도 낯설고 줄거리도 감을 잡을 수 없다. 집안을 꾸며놓은 세트도 좀 이상하다. 중산층이라고 만들어놓은 세트 같은데 내가 아는 중산층은 저런 식으로 꾸며놓고 살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구경 간 적 있는 모델하우스처럼 생겼다. 고화질 화면이라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 주름도 보이고 땀구멍까지 보일 정도다. 신기하다, 신기해.
그런데 이상하다. 연기자들이 자꾸 드러눕는다. 불협화음의 피아노 음악도 깔린다. 큰일이 일어났나보다. 말 잘 듣는 아들이 갑자기 한 여자(가난하지만 예쁘고 능력 있는)를 데려오면 어머니가 드러눕는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에 부합하는 며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행복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 여자의 수준이 자기 아들과 집안에 맞지 않아 홧병이 날 정도다. 여자는 미래의 시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지만 시어머니는 꼴도 보고 싫다는 듯 돌아누워 버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머니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는 아들은 어머니한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여자와 함께 사라진다.
남편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하면 아내가 드러눕는다. 아내는 남편보고 이기적이라고 쏘아 붙인다. 가족의 행복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화를 낸다. 이상하다. 아내는 남편의 행복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남편은 가족의 가장 큰 멤버일 텐데. 남편은 자신이 진정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언지 관심이냐 있었냐고, 내가 돈 버는 기계냐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여자는 아이들의 학원비, 대출 이자는 어떻게 갚을 거냐고 말한다. 남편은 문을 쾅 닫고 안방을 나가버린다.
아내가 바람이 나면 남편이 드러눕는다. 아내가 왜 외도를 했는지, 자신이 평소에 아내를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는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오로지 윤리적 잣대로 아내를 비난한다.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냐고. 아내는 작은 슈트케이스까지 미리 준비했다. 남편은 소파에 드러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늦었다. 아내는 슈트케이스를 끌고 사라졌으니까.
이런 일들은 일생에 한두 번 일어날까 말까 한데 드라마에서는 흔히 일어난다. 채널을 돌리면 반드시 드러눕는 사람들이 나온다. 왜 저렇게 행동을 할까 속이 답답해 채널을 돌리고 싶지만 나는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 한다.
자, 다음 장면에서 사단이 일어나야 하는데, ‘다음 이 시간에….’ 라는 자막이 뜬다. 그리고 대출광고 시작. 아…. 티브이가 있었더라면 다음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꼭 봤을 것이다. 다행이다. 집에 티브이가 없어서.
왜 드라마에서는 사람들이 곧잘 드러누울까? 드러눕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만의 행복의 기준이 없을지도 모른다. 남들의 기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니 상대방이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속이 상하는 것이다. 혹은 자신의 기준이 있는데 가까운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거나. 드러눕는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돌양과 함께 흉을 보지만(같이 흉을 보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결국에는 나도 현실에서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재미있구나. 우리의 인생이 드라마보다 낫기는 생각보다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