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인생의 큰 갈림길 같아보이지만

독자메일>>

안녕하세요. 저는 20살이지만 안타깝게도 대학에 진학하지않은 ㅠㅠ삼수생입니다 ㅠㅠ
제가 생일이 빠른년생이라서 재수를 했음에도 나이는20살입니다.
고3현역때는 후회를 남기지않기위해 재수를했지만 재수동안 성적이 오르고 나서보니 욕심이나네요ㅠㅠ
주변사람들이 감사합니다하고 지금대학에 만족하라지만 저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던 와중 작가님 책을 보게되었습니다.
뒤늦은 사춘기 ….. 제가 딱 그꼴입니다. 고3때 정신차려서 공부하면서 하고싶은 일찾고, 뭐하고살지 생각하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ㅠㅠ
작가님 말씀대로 주변사람들은 모두 안정된 직장을 선호하니까 제 속에서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제 생각대로 밀고나가자니 불안하고 다른사람말이 맞는거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이렇게 사는건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작가님 책<서른아홉,피아노를배우기시작했다.>를 보고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어느정도 확신?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인생이렇게 살아도되는구나 하고요 ㅋㅋㅋㅋㅋ하고싶은 일 하면서 사는 멋있는 인생!!존경합니다!!
저도 사실 고1때 수영 고2때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ㅋㅋㅋ 학교친구들은 제가 수영으로 대학가는줄 알고있었고요 ㅋㅋㅋ
인생은 참아이러니하게 어렸을때 학원다니면서 배울때는 정말 흥미 없고 재미없게 느껴졌는데 고등학교 딱 들어가니까
음악의 아름다움 ? 그런것이 느껴졌습니다. 기타치고 피아노치는 사람이 정말 멋있게 보였습니다.
저도 어렸을때 빼고는 배워본적이 없어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배우는게 참 힘들었지만 묵묵히 잘다녔습니다.
그런데 고3이되니까 공부를하느라 좀 소홀해져서 다시 원상태입니다 ㅠㅠ
또 작가님이 천장벽지를보며 이런게 어른이 되는건가? 하는 부분과 외면할수 없는것들 때문에 인생이 바뀐다는 부분은 참 인상깊고 공감되었습니다.
작가님 책덕분에 제가가는길에 조금이나마 확신이 생겼습니다.
외로운 삼수생활,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좋아
p.s덧붙여서 작가님이라면 현역때보다 성적이 올랐지만 욕심을내서 삼수를 할지 ,아니면 재수성적에맞춰서 대학을갈지 알려주세요 작가님의충고를 듣고싶습니다.
(작가님의 입시이야기도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ㅋㅋ)
서진의 답변>>

안녕하세요 윤은지 독자님, 서진입니다.
책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작게나마 위안이 되셔서 다행입니다.
저는 재수를 해 본적이 없는데, 친구는 삼수까지해서 원하는 대학에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학이 인생의 큰 갈림길 같아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크게 본다면 내가 진정 무얼 원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고 그 과정 중에 대학이 있는 거지요.
좋은 대학에 가서 중간에 그만 둔 친구들도 있고 졸업을 해도 좋은 직장에 가지 못한 친구들도 많아요.
목표를 갖고 그걸 위해 달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그 목표가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목표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 같네요.
저는 굉장히 소심해서 원하지도 않은 학과에 안전하게 들어갔어요. 전자공학과를 들어가면 S전자, L전자에 취직해서 보통사람들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세월을 좀 낭비했지만, 그것 자체로도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추운 겨울 건강하세요!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지요?

독자메일>

저는 28살의 청년입니다. 직업은 현재 장교로 근무하고 있고, 아직까지는 남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작가님의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을 자주, 그리고 꾸준히 읽는 편인데 많은 자기개발서적 그리고 사회상을 담고 있는 논설, 사설은 사회에 대한 비판 혹은 개인에 대한 간접적인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글들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작가님의 글에는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아서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30살, 늦으면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에 사회로 나가게 됩니다. 물론 자진해서 전역을 택하기는 했지만, 전역을 택한 그 순간부터 자신에 대한 자괴감, 자신감 하락이 많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작가님께서도 기존 직장을 그만두시고 혼자가 되셨을때 많이 힘드셨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떤 방식으로 그 공허함을 채우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저는 지금도 매일 열심히 일하고, 21시에 집에 오면 24 ~ 01시까지는 책, 공부를 하고 수면을 취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초라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당연한 일일까요.. 걱정을 걱정을 낳고 희망은 희망을 낳는다고 하는데, 저는 그 걱정이란 놈이 너무 많이 낳아버린 것은 아닌지 ㅎㅎㅎ
답장을 꼭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만 글 줄이겠습니다. 짧지 않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서진의 답장>

독자님 반갑습니다. 먼저 책을 잘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종 독자 편지가 오는데 장교는 처음이네요. 저는 이제 마흔을 훌쩍 넘어버려서 서른이라고 하면 정말 젊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서른은 참 애매한 나이인것 같습니다.

모든게 이루어 질 수 있을 것 같고, 또 모든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지요. 독자님의 메일을 읽고 제가 서른으로 돌아가면 무얼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저도 꽤나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제가 다시 돌아간다면 더 재미있게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냥 놀겠다가 아니라, 좀 더 재미있게 살겠다, 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은 어쩌면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지요? 재미있게 살다보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길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무엇이든 공부하고 연마하는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새해, 원하시는 일 다 잘 되길 진심으로 빕니다.

진심으로.
* 서진은 모든 독자의메일에 답합니다.
orientshine@naver.com

잊지못할 광안리 결혼식

wed
결혼식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온통 머릿속에는 날씨 걱정밖에 없었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비가 올 확률 80퍼센트였다. 남들처럼 예식장에서 했다면 ‘결혼식 날 비가 오면 신랑 신부가 잘 산다’는 속 편한 이야기를 떠올렸겠지만 우리는 사정이 달랐다. 결혼식을 광안리 해변 야외무대와 백사장에서 전통혼례로 치룰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아침에는 하늘에 해가 약간 비치면서 날씨가 개는 듯했다. 신부가 화장을 하러 간 사이에도 하늘은 짙은 구름이 점점 밀려오고 있었다. 예식은 오후 한시에 시작될 예정이었고 열두 시에 장소에 도착하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미리 준비한 색동 현수막도 걸려 있고 진행을 맡은 친구들은 의자배치와 텐트 설치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의 권유대로 예식장에서, 남들처럼 결혼식을 했으면 비 걱정을 하면서 안절부절 하지 않았을 테지만 후회해봤자 늦었다.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전통 혼례 행사라도 있는 줄 아나 보다. 나는 일당을 받으면서 일하는 신랑이고.
우리는 결혼식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몇 년 째 함께 살고 있었으니까.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결혼식을 한들 사는 집도 그대로, 살림도 그대로다. 광안리 해변가 근처 4층 건물의 옥탑방에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한 마리의 늙은 개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갑자기 결혼식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점점 연로해지시는 부모님 때문이었다. 우리는 번듯한 직장도 없고, 차도 없고, 집도 없었다. 부모님께 용돈을 꼬박 꼬박 드리는 것도 아니고 자주 찾아뵙는 것도 아니었다. 양가 부보님들은 자식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즐겁게 사는 것을 묵묵히 지지해주셨기에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 부모님들에게 마지막 효도라도 하자는 착한 마음이 문득 들어서 결혼을 결심했다. 아니, 결혼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공장에서처럼 찍어내는 결혼식은 하기 싫었다. 어떤 방식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하는 게 좋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삼십분만, 딱 삼십분만 견디면 되는 거야.”
결국, 전통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돌양은 웨딩드레스를 입기 싫어했고(살을 조금 빼서 입으면 예쁠 테지만), 야외에서 보다 여유롭게 치룰 수 있다. 우리 부모님도 전통혼례를 올렸는데 그 때엔 집 앞 마당에서 했단다. 우리 집은 마당이 없으니까 마당이나 다름없는 광안리 바닷가에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통혼례 연구소에 상담을 갔다가 그 생각을 전했더니 원장님은 재밌어 했다. 안 된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통이 크신 분이셨다.
“지금까지 바닷가 백사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한 번 해 보죠 뭐.”
원장님도 나도, 비오기 직전의 바닷바람이 얼마나 사나울 수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해변에 손님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친구들을 즉석에서 일꾼으로 변신시켰다. 교자와 가마를 들고 백사장을 출발해 무대로 향했다.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과 아이들, 외국인들도 신기한 듯 사진을 찍어댔다. 집례는 우리가 평소에 존경하는 선생님이 서 주셨다. 미리 자료조사를 해 오셔서 식의 의미에 대해 손님들에게 재미나게 설명을 잘해주셨다. 예식을 최대한 간소하고 공평하게 줄여주셔서 절을 많이 생략했다.
결혼식 내내 머릿속이 멍했다. 도우미가 하라는 대로 손을 씻고, 절을 몇 번 하고, 술을 마시고 또 절을 했을 뿐이다. 내 신경은 온통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점점 짙어지는 구름으로 쏠려 있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져서 초례상 뒤의 병풍은 아예 세울 수도 없었고, 초례상이 거의 날아갈 뻔해서 도우미가 상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 때 사진을 보면 신부는 방긋 웃고 있는데 나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결혼의 의미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친구가 축가를 멋지게 부르고 단체 사진을 찍고 식사를 하러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제냐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때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에서 나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사진을 나는 가끔씩 본다.
결혼식을 한 후에 정산을 해 봤다. 우리는 야외촬영, 실내 촬영을 하지 않았다. 비디오도 찍지 않았다. 일 년만 지나면 그런 것은 보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혼식 당일 날 사진은 사진작가 친구와 후배들이 해 줬다. 현수막의 붓글씨도 서예를 공부한 친구가 써 줬다. 예물 예단은 일체 교환하지 않았다. 처음엔 ‘간소하게 하거나 하지 맙시다’로 이야기하다가 결국엔 기본적인 것을 이것저것 교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진짜로 아무것도 교환하지 않았다. 축의금은 부모님께 모두 돌려드렸다. 뒷풀이는 친지 어르신들과 친구들의 장소를 따로 빌렸다. 부모님은 어르신들의 식사비를 내고, 우리는 폐백에서 받은 절값으로 전통 예식비와 친구들의 식사비를 계산했다. 신혼여행은 다음 기회에 가기로 했다. 결국, 결혼을 하니 돈이 남았다.
“진즉에 할 걸 그랬어.”
아내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첫날밤, 밖에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우리는 세 마리 고양이와 한 마리의 개와 함께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