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기타학원에 등록한 이유는, 집하고 학원이 가까운 곳에 있기도 했지만 ‘석 달에 10만원’ 이라는 파격적인 수업료 때문이었다.
짜장면집 지하에 (처음으로 기타를 배웠던 곳도 지하에 있었다) 섹스폰을 연습하는 서너 개의 부스가 있고 한 가운데에는 드럼 세트도 있었다. 학원이라기보다는 연습실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원장의 인상은 조금, 이상했다. 문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카락이 굉장히 짧고, 얼굴은 언제나 부어있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썼고, 구라가 셌다.
지금은 배나온 40대 후반이지만 전직 유도선수였고, 예전에 대구에서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고 했다. 뒤늦게 암흑의 세계에서 그를 구원한 건 아내다. 어떤 연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부산에까지 내려와 음악학원을 차리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들은 두 딸과 함께 학원이 있는 건물 3층에 살고 있었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오시오 코타로의 ‘황혼’ 이라는 기타 연주곡이었다. 핑거스타일의 연주곡으로 멜로디와 아르페지오 화음을 같이 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성하가 핑거스타일 기타연주로 유튜브 스타가 되기도 했다. 기타로 반주를 치면서 노래를 하기 보다는 하나의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다. 황혼이라는 곡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해질녘의 쓸쓸함을 느낄 것이다. 그걸 온 몸으로 느끼면서 연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타 선생님은 인디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나보다 열 살 정도가 어렸다. 나는 그를 ‘기타 샘’ 이라고 불렀다. 내가 보기에 기타실력은 신의 경지에 가까웠다. 주말이면 가끔씩 연습실에서 합주도 한다고 했다. 드럼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같은 그룹 멤버다.
그는 수업 첫 시간 나에게 기타줄을 제대로 잡는 방법, 제대로 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쳤다. 몇 년 동안 기타를 배웠지만 기본적인 자세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한 음, 한 음 정확한 울림으로, 올바른 자세로 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십분 씩이라도 손가락 운지를 연습해야 한다.
“혹시 밥만 먹고 기타만 친 적 없어요?”
라고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사실은 군악대에 있었거든요. 정말 밥만 먹고 하루 종일 악기를 연주했어요. 그 때엔 기타 말고 드럼이나 베이스도 번갈아 가면서 쳤지요.”
그렇구나. 다, 그런 미친 시절이 있어야 잘하는 구나.
나는 과연 남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확실한 기술이 있을까? 소설을 쓰는 것은 과연 기술일까?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쓸모가 있는 것일까? 고질병처럼 도진 취미생활이 아닐까? 혹시 기타 샘은 음반 하나 내지 못하고 평생 레슨이나 하면서 살 지 않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음악학원을 차리는 게 아닐까? 실패한 예술가는 예술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을 가르친다던데. 나도 결국엔 논술과외 선생이나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레슨을 마치고 원장, 기타샘, 섹스폰을 배우는 아저씨 두 명, 드런 샘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학원 바로 맞은편에 우포식당이라는 곳에서였다. 실내 포장마차 같은 분위기였는데 붙임성 있는 아주머니가 기막힌 오뎅탕을 만들어주셨다. 섹스폰을 부는 아저씨들과는 자주 술을 마시는 듯 했다. 어쩌면 원장은 학원을 운영하는 것 보다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학원생들끼지 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얼떨결에 포지션이 기타가 되었다. 중년 취미 밴드의 가장 나이 어린 맴버. 꽃청년.
“그거 아나 서작가? 마흔이 넘으면 문득 쓸쓸할 때가 있데이. 그거는 가족도 여자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기라.”
원장은 외롭다는 타령을 많이 했다. 아저씨들이 음악학원에서 색스폰을 부르는 이유도 똑같은 이유일까? 뽕짝 멜로디를 반주에 맞춰 부르기 위해서 퇴근길에 간판도 없는 음악학원을 기웃거린다. 삐이익 하고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것만 배우는 것도 한참 시간이 걸린다. 방음시설이 되어 있는 연습실에서 누가 들을까봐 문을 꼭 닫고 연습한 뒤, 색스폰을 놓아둔 채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마스터 하고 싶은 것은 어려운 재즈가 아니다, 예술이 아니다. 굳세어라 금순아, 홍도야 울지마라… 캬바레에서 듣던 구성진 멜로디를 지하철 무대에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연주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가족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마치 늦바람이라도 난 듯이 조심조심.
기타를 배운지 두 달이 약간 넘었을 때 나는 황혼을 삼분의 이쯤 까지 칠 수 있게 되었다. 손가락에 적당히 굳은살도 베였다. 아내는 맨날 똑같은 곡을 들어서 지겹다고 했지만 가끔씩 내게 그 곡을 쳐보라고 주문했다.
어느 날 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또, 우포식당으로 오라는 것인가?
“어이, 서 작가. 삼십 만원 있나? 갑자기 쓸 데가 있어서 그라는데 현금이 없네? 옆에 살고 있으니까 전화해 봤다.”
그 때 정확히 어떤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제가 무슨 돈이 있어요.’, ‘카드 값도 못 냈어요.’, ‘죄송해요, 없어요.’…. 아무튼 거절을 한 건 확실하다. 원장이 전화를 끊을 때 뚝, 하던 소리가 기억나니까. 원망을 가득 담은 그 소리. 너도 친구가 아니었다고 말 하는 그 소리.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부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알았다고 하는 원장의 태도가 실망스러웠다. 내가 아니라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겠지. 분명 우포식당에서 술을 함께 마시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바쁜 일이 있었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정도는 짬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전화를 받은 후로 학원에 가지 못할 소소한 핑계가 생겼다. 한 번 빼먹은 레슨은 두 번, 세 번 빼먹기가 더 쉽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등록했던 삼 개월을 채웠으니 학원을 가야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차피 이제는 혼자 연습해도 되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기타를 잡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손가락의 굳은살은 사라져서 다시 말랑말랑해졌다. 그러는 사이 긴 여행을 다녀왔고, 학원이 있던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다.
‘연습실 전세. 2층 집 전세.’
그렇다. 학원이 사라진 것이다. 학원 뿐만 아니라 2층에 살고 있던 가족도 다 함께 사라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포식당도 문을 닫았다. 학원과 우포식당이 모두 문을 닫은 것이 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기타는 먼지가 쌓여서 가방 안에 두었다. 왼쪽 집게 손가락에 통증이 생겼는데 에프 코드를 너무 심하게 잡아서 그런가 싶어 기타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기타샘을 만나게 되었다. 밴드와 함께 해운대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었다. 학원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원장이 야밤 도주를 했단다. 못 받은 돈도 많고, 드럼 선생님은 돈까지 빌려줬는데 받지를 못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를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어른 수강생들에게도 돈을 빌렸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실망했다. 전직 조폭이라고 해도, 마음은 따뜻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줄로만 알았다. 중년이 더 외롭다는 그의 제스쳐에 다른 중년들도 넘어갔을 것이다. 어디선가 크게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색스폰에 먼지가 쌓여서 케이스 안에 들여놨겠지. 아니다. 색스폰은 학원에 보관해두었으니 그것마저 다 쓸어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황혼을 연주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아픈 것은 기타 때문이 아니라 목의 자세가 좋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나는 더 이상 기타를 잡지 않는다. 이상하게 뚝, 하고 관심이 끊어졌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가끔씩 휴대폰에 담아둔 오시오 코타로의 연주가 랜덤플레이로 튀어나올 때마다, 우포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중년 아저씨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어 뭔가를 해보지만 잘되지 않았던 사람들 말이다. 원장도, 색스폰을 배우던 아저씨도, 그리고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