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아워

2015_4_8

와이키키 비치와 그닥 멀지 않은 곳에 누드비치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알고 싶은 사람은 알 수 있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른다.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푯말도 없다. 한적하고 외딴 곳이라 예전부터 한가하게 누드로 선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누드비치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 번 찾아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졌지만 대충 ‘어디 근처’라고만 나와 있었다. ‘어디 근처’에 가기 위해 언덕을 내려갔는데 길이 험했다. 비잉 돌아가면 편한 길이 있지만, 이왕 왔으니 그냥 내려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절벽에 남남 한 쌍이 누드로 있다가 화들짝 중요부위를 옷으로 가리는 것을 봤다.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바닷가에는 당당하게 다 벗고 선탠을 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 제외하면 다들 옷을 입고 있었다. 파도도 별로 없어서 서핑을 할 수도 없고, 수영을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론, 옷을 벗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셔츠만 벗고, 썬글래스를 낀 채로 그냥, 앉아 있었다. 대단한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실망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막상 이름난 여행지를 가면 느껴지는 공허함과 마찬가지다. 이런 걸 보기 위해 힘들게 여기까지 왔나.
왼쪽 편에는 젊은 커플이 수영복을 입은 채로 놀고 있었다. 어쩐지 미국인처럼 보이지 않고 유럽인처럼 보였다. 남자와 여자, 둘 다 살짝 야위었다. 여자는 금발의 숏커트에 가슴이 작아서 소년처럼 느껴질 정도다.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꼭 붙어 다녔다. 누워 있을 때에도 여자의 손가락 하나를 남자가 잡고 있었는데 그걸 훔쳐보는 게, 누드를 훔쳐보는 것 보다 더 부끄러웠다.

나는 혼자였다. 이 세상에, 상대방 말고 다른 것은 더 필요하지 않았을 때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어쩌면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도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바램은 사람의 기억을 왜곡시키기도 하나보다.

해가 기울 무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플은 바다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자기들끼리 노느라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옷을 벗고 있던 할아버지가 시익 웃었을 뿐이다. 해피아워에 늦겠다. 오늘은 어느 술집으로 갈까?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다를 향해 난 멋진 집들을 지나 카피올라니 파크를 걸었다. 학교를 마치고 축구 연습을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검은 썬글래스를 끼고 조깅하는 여자를 지나쳤을 때, 문득 나는 썬글래스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바닷가에 두고 왔다. 해가 질 무렵, 풍경을, 실은 젊은 커플을 자세히 보기 위해 벗었는데 오렌지색 케이스에 넣어두고는 그대로 와버렸다.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뛰어보기도 했지만 조금만 가도 숨이 찼다. 발가락 사이에 샌들이 끼어서 쓰라렸다. 그건 보통 선글래스가 아니다. 도수가 나에게 딱 맞춰진 하나 밖에 없는 선글래스다. 그게 없으면 흐릿한 초점으로 세상을 보거나, 눈부심을 감수하고 세상을 봐야 한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 즈음 해변 입구에 다다랐다. 트럭 한 대가 입구를 가로 막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중년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혼자,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샌들을 벗고 저벅 저벅 모래사장을 걸었다. 옷을 다 벗고 있던 할아버지는 자리에 없고 대신 붐박스를 들고와서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놓는 젊은이 무리가 보였다. 맥주병을 치켜들고 하이, 라고 내게 인사를 하며 뭐가 좋은지 자기들끼리 웃어댔다.

썬글래스는 내 자리에 있을까? 가는 내내 그 걱정을 하다가, 에잇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체념이 들었다. 누가 가져가도 눈에 맞지 않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유명 브랜드도 아니라 그냥 놔뒀을 수도 있고. 마침내 내가 앉던 자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안도를 했다. 오렌지색 썬글래스 케이스가 보였다. 그런데 그건 모래사장에 처박혀 있는 게 아니라 살색 피부의 다리 위에 살포시 놓여 있었다. 바로, 내 옆에서 놀고 있던 커플의 여자였다.

“하이!”
나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자는 나를 보더니 생각이 난 듯 손을 흔들며 동시에 썬글래스 케이스를 내밀었다.
“고마워. 깜빡했지 뭐야.”
그런데 이상하다. 남자는 어디로 갔는가? 바다를 봐도, 주변을 봐도 남자의 흔적이 없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어 있었는데. 여자의 얼굴을 살펴본다. 눈 주위가 붉다. 울었던 게 틀림 없다.
“감사의 인사로 맥주 한 잔 사고 싶은데 괜찮겠어?”
내가 말했다. 여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와이키키의 해피 아워(happy hour)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저녁 시간 전, 오후 다섯 시 경부터 일곱시까지 술이나 안주를 싸게 파는 것이다. 어떤 곳에는 밤 늦은 시간에 해피아워가 있다. 밤 열시 혹은 열 한 시 이후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싸게 판다. 요일별로 해피아워를 하는 곳도 있고, 하루 종일 해피아워인 곳도 있다. 나는 그 시간에만 맞춰서 술을 마신다. 가격이 싼 게 가장 큰 이유지만 사람들도 그 시간엔 덜 붐빈다. 하와이에 와서 행복해 죽겠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도, 과장스런 웃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빈도수가 다를 뿐이지 그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나는 해피 아워의 언해피 맨이 되어 차가운 맥주를 들이키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혼자가 아니다.

누드비치에서 가장 가까운 바는 룰루다. 룰루는 광대한 카피올라니 공원이 끝나는 지점, 와이키키 비치가 시작되는 지점의 모서리 2층에 자리잡고 있다. 룰루의 해피아워에 맞춰 코나 롱보드 맥주를 한잔씩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음식도 별로 맛없고 맥주도 다양하지 않지만 2층의 테라스 좌석만은 최고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고, 석양이 지는 것도 구경할 수 있다. 물론 유리창 따위는 없다. 이 동네는 에어컨도 필요 없을 정도로 적당히 서늘하고, 창밖의 공기가 건물 안의 공기보다 더 깨끗한 것이다. 우리는 창가로 난 좌석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있다.

석양 보다, 석양 후의 하늘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매일 매일 하늘의 색깔이 다르게 변한다는 것도. 오늘은 보라색 빛이 옅은 깃털 구름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이 동네 살아?”
여자가 묻는다. 맥주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나는 벌써 반을 비웠는데.
“설마. 여행 중이야. 너는?”
“나도. 프랑스에서 왔어.”
그렇구나. 어쩐지 피부가 너무 하얗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물어본다.
“오늘 헤어졌어.”
풋, 하고 웃을 뻔했다. 여자의 대답이 너무 진지해서.
“퀘사디아라도 하나 시킬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룰루에는 보통 미국사람들이 먹을만 건 다 있다. 스테이크, 햄버거, 멕시코 음식. 기름지고, 몸에 좋지 않은 것들만 가득.
여자는 남자를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틀 전, 게스트 하우스 로비에서 아침식사(공짜로 주는 식빵과 딸기잼)를 하다가 우연찮게 말을 텄다나. 한 두 해 정도 사귄 커플처럼 보였는데.
부럽다. 이십대 초반이라…… 누구든 쉽게 사랑할 수 있고, 또 누구든 쉽게 이별할 수 있는 나이니까.
“남자가 잘못했구나.”
지레 짐작해서 말해봤다.
“아니, 내가 잘못했어.”

그 때 음식이 나왔고 여자는 말을 잠깐 멈췄다. 주름이 많은 웨이트리스는 나의 맥주잔을 슬쩍 쳐다보았다. 나는 손가락을 까딱 들어올렸다. 코나 롱보드 라거(Kona Longboard Larger)는 하와이의 공식맥주다. 다른 곳에서도 마실 수 있지만 하와이에서 마실 때 가장 맛있다. 빅 아일랜드에 있는 코나의 제조맥주 공장에 간 적도 있다.
맥주와 안주가 도착했다. 얇은 피자처럼 생긴 퀘사디아 한 조각을 그녀는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부글 부글 기포가 입안에서 터져 빈속으로 들어갔다. 안주를 먹지 않는 것. 그것이 제대로 기분좋게 취하는 방법이다.

“지난 밤에, 다른 남자와 잤거든.”
“응?”
맥주를 삼키다 목에 걸려버려 기침을 몇 번 해야 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여자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테라스 밖을 쳐다본다. 칼라카우에아 도로엔 하와이 원주민들이 들고다녔을 법한 토치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서핑 보드를 들고 돌아가는 사람, 저녁을 먹으려고 나온 사람, 그냥 거리를 걷는 사람으로 분주하다.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말했다. 그제야 여자는 나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미지근해져버린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청했다. 쨍, 하고 잔이 부딪쳤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리를 살짝 돌려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한 하와이의 바람이 불어왔다.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면 이런 바람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아, 저기. 캘빈이다!”
다른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도 돌아볼 정도로 여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바닷가쪽으로 가는 건널목에 그 남자가 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너 시간 전에 누드 비치에 손을 꼭 잡고 함께 누워있던 그 남자.

“미안. 나, 잠시 다녀올게.”
여자는 내 동의 따위는 듣지도 않고 룰루를 뛰쳐나갔다. 나는 여자가 아래층 거리로 나가 깜빡깜빡 붉은 신호등이 켜지려고 하는 건널목을 건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속으로는 빨리 정지등이 켜져서 여자가 건너가지 못하길 바랬지만 용감하게 여자는 건너갔다. 그리고 남자의 손을 잡는다. 남자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다. 화를 내라 화를.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는다. 사람들은 모른척 지나간다. 와이키키에서는 서로 끌어안는 청춘남녀 따위는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산뜻한 키스. 나를 보라고 일부러 저러는 걸까, 싶을 정도다. 손이라도 흔들어줄까?

하지만 여자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남자와 함께 걷는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그들이 사라지는 서쪽편 칼라카우에아 거리를 바라본다.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해피아워의 마지막 주문을 하시겠어요?”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나의 술잔과 여자의 술잔을 가져간다.

-끝

토요일 밤의 스타벅스

토요일 밤, 바젤의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거리는 흠뻑 취해 있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보름 정도 더 남았는데 그 때까지 매일 매일 축제 같은 기분에 빠져 있으려고 사람들이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스위스라면 산속에 마을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바젤은 라인강이 흐르는 독일 작은 국경마을이다. 메인 스트릿은 차 없는 거리로 변했고 반짝거리는 전등장식과 화려한 가게들이 불빛을 비췄다. 낮에는 쿤스트 미술관에 들러 수십개로 쪼개진 작은 방에서 그림을 봤다. 이 작은 마을에 피카소, 달리, 고흐와 모네의 작품이 주루룩 걸려 있다니. 종이박물관, 만화박물관등 크고작은 박물관이 있단다. 나는 미술관 하나로 충분했다. 여행지에서는 박물관 보다 거리를 걷는게 낫다. 그들에게는 평범하지만 이방인에게는 특별하다.

음반가게 입구의 지붕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것을 조금 듣고, 산 속에서 부는 거대한 피리 같은 것을 부는 사람도 구경하다가, 골목에 있는 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짝거리는 전등, 빙글빙글 돌아가는 루돌프,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소시지와, 뜨거운 와인을 팔고 있었다. 시큼한 향기에 이끌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뜨거운 와인을 홀짝거렸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화악 하는 알콜 기운이 입안으로 들어와 기침을 콜록거려야했다. 이런 걸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  사람들이 즐거워 보일수록 나는 더 쓸쓸해졌다. 새로운 것들을 보고, 먹는게 신기하면서도 익숙한 것이 그리워졌다.

밤 여덟시가 지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아버렸다. 시청률 1위의 국민드라마라도 하나보다. 조금더 방랑해도 되는데. 아쉬운 마음으로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트램을 탔다. 라인 강을 건너자 거리는 조금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역 바로 앞에 불을 밝힌 스타벅스가 보였다. 매장은 2층까지 있고 크기도 꽤 컸다. 나는 충동적으로 트램에서 내렸다. 차가운 강바람이 몰아쳤다. 으슥한 골목에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걸 애써 무시하고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이런데서 바보같이 스타벅스라니. 하지만 전 세계 어느 곳에나,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스타벅스에 있는 것 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공기도 따뜻하고 커피향도 좋다.

로고도, 장식도, 커피맛도 똑같다. 부산의 여느 스타벅스라고 생각해도 좋은, 고향에 온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1층에서 카푸치노를 시켜 흰설탕을 가득 뿌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빈 소파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빈 테이블이 없어서 빈 자리를 찾았다. 창가쪽에 편하게 보이는 의자가 보였다. 맞은편 소파에는 여자가 귀에 뭔가를 꽂고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다.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 이 여자는 숙소의 주인 메르케가 아닌가? 얼굴이 하얗고 주근깨가 좀 나 있다. 그녀는 이어폰을 빼고 반갑게 웃는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좋은 집을 놔두고 트램을 타고 여기까지 와서 고작 혼자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다니.
“그냥 공부하는 거야. 너는?”
“집에가려다 그냥 들러봤어.”
그녀는 이어폰을 다시 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으려다 컵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럼, Have fun”
마치 처음부터 앉을 생각은 없었다는 듯, 나는 슬며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니 더욱 더 찬바람이 불었다. 으쓱한 골목에서 하이힐을 신은 여자는 담배를 조급하게 피우고 있었고, 나는 지나치게 쓰고, 지나치게 단 커피를 마시며 트램이 오기를 기다렸다. 제발, 빨리 오면 좋겠는데. 힐긋 2층을 보니, 메르케가 보였다.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덜 쓸쓸한 것이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보름밖에 남지 않은 토요일 밤은.

-바젤,스위스

11번 방갈로의 비밀

2015_3_30

가격이 싼 대신, 벽에서 뭔가 튀어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래된 방갈로였다. 태풍이 불면 금방 날아갈 것 처럼 허술하게 나무판자로 대충 지어졌다. 부도가 난 공사장 처럼 리셉션에는 시멘트와 벽돌이 나뒹굴었다. 더듬 더듬 영어를 할 수 있는 아저씨가 한 분 있을 뿐이다. 한숨이 나올 정도였지만 지갑에 든 돈으로 삼일밤을 머물 수 있는 곳은 이곳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방갈로는 총 16개가 있는데 입실날짜와 퇴실날짜가 화이트 보드에 적혀 있어서 그걸 보고 예약이 가능했다. 나는 비어 있는 단 하나의 방, 11번 방에 묵게 되었다. 선택할 수 있는 방이 여러개였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선택보다는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 훨씬 맘 편하다. 이 방이, 다른 방보다 좋은 점에 대해 혼자서 계속 생각하면 되니까.
11번 방갈로는 낡기는 했어도 바다 바로 위쪽에 집이 있고 바위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다. 누군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문 사람이 만들어놓은 나무 사다리다. 그 사다리를 통해 바위로 내려가서 바로 바다로 뛰어들 수 있다. 바닷속에는 줄무늬 물고기도 있고, 대왕조개도 있고, 산호도 있고, 상어도 있었다. 신경쓰이는게 하나 있다면 붙어 있는 옆쪽 방갈로의 베란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맙게도 그 쪽에 머무는 사람이 꽃무늬가 그려진 천조각으로 내 쪽 베란다를 막아두었다. 나는 하루종일 베란다에 나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책이라도 있으면 읽어볼 테지만 상관없었다. 멍 하니 바다를 보고 있다가, 사다리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 물 속을 보다가, 또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부셨던 햇살도 점점 노랗게, 빨갛게 변해갔다. 전 세계 어느 곳이든 그 시간이 되면 모든 사람들은 울적해지기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도 마찬가지겠지. 하루하루의 종말을 모아놓으면 결국 죽음이 될 테니까. 맥 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곳은 말레이시아. 대신, 근처 식당에서 리필해온 생수를 꿀꺽 한 모금 마셨다. 한 낮의 열기를 머금고 이미 미지근해 버렸다.
그 때, 옆 방갈로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천 때문에 누군지는 볼 수 없었다. 콜록, 하고 마른 기침 소리가 나더니 이내 담배냄새가 풍겼다. 머리가 띵해졌다. 담배 한 개피만 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베란다를 막고 있는 천을 슬쩍 걷어 냈다. 그곳엔 여자 한 명이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몸에 실오리가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헬로”
라고 그녀가 말했다.

<쁘렌띠안, 말레이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