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오후 다섯시, 전기가 들어오면 사방에서 노래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느 곳은 그냥 노래를 틀어놨고, 또 어느 곳은 노래방 기계가 작동되고 있다. 옆집에서 아무리 노래를 크게 틀어놔도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나보다. 어차피 자기도 그럴 일이 있을 테니까. 맥주 기운에 힘입어 노래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았다. 동네 주민들이 노래를 부르다 나를 발견하고 한 곡 부르라는 시늉을 한다. 못 부를 거 없지. You Light Up My Life를 부른다. 여자 키라 좀 낮춰달랬더니 그런 기능은 없단다. 필리핀 사람들은 웬만한 올드 팝송은 다 알고 있다. 나는 길베이 진을 들고 나가 조금씩 홀짝거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캐나다 커플도 찾아와 우리를 구경했다. 노래를 부르라고 부추키니 절대 사양이다. 노래를 마쳤는데 자꾸 부르라길래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노래방이 있는 개인 집에서 영업 비슷한 걸 한 건지, 그냥 동네 노래방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백페소를 부르면 제한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기에 그냥 웃었다. 돌양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조금 전 이상하게 들리던 노래의 주인공이 나였나며 비웃었다. 후후훗. 그래 나였다.
34.
이곳에는 물고기보다 산호가 많다. 이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여름에 물고기가 좀 많이 잡힌단다. 대신 산호가 아름답다. 누가 가꿔놓았는지 몰라도 기가 막히다. 사람의 작품 따위, 그림 따위,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냥 가만히 놓아두는 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쫓아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면 산호는 색을 잃어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산호 위를 조류를 따라 둥둥 떠다녔다. 오늘은 이상하게 파도가 잔잔해서 역으로 수영해 와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두 시간이 넘게 스노클링을 하고 나서 오후에는 비가 마구 쏟아졌다. 다행이다. 원 없이 마지막으로 스노클링을 해서. 빈둥거리면서 발렌타인 스페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보홀에서 만드는 특별한 아이스크림이라고 하는데 단 것 이외에 뭐가 특별한지는 잘 몰르겠다. 이 섬에서 찬 것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겠지. 섬에는 곳곳에 공동 오두막이 있다. 약간 높게, 뒤로 기울어진 대나무 벤치가 있는데 거기 앉아있으면 편하다. 한 식당에도 그 벤치가 놓여 있어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커피도 시켜 먹었다. 휴대폰 신호도 곧잘 터져서 돌양은 페이스북 삼매경에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심카드를 넣지 말걸 그랬다. 섬에서 할 일이 없어지면 계속 데이터 신호가 잡히는 곳을 따라 배회하는 것이 일이 되어버리니까.
35.
섬 동쪽 끝으로 산책을 갔다가 묘지를 발견했다. 작은 집인 줄 알았는데 시멘트로 대충 만든 묘지가 이곳저곳에 보였다. 사람의 이름과 태어난 날, 죽은 날, 간단한 애도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작은 묘지는 어린 아이의 것이었겠지. 자리가 모자라 2층으로 올린 묘지도 있었다. 이 섬에서 태어나 이 섬에서 죽은 사람들. 슬프거나 무섭다기 보다는 평화로워 보였다. 어떤 묘지에는 작은 콜라병이 놓여 있었다. 어디서나 다들 비슷하구나.
36.
새벽에 섬을 빠져나왔다. 바클레이언으로 일을 하러 가는 동네 사람들의 배(라고 하지만 베스의 친척이 선장이다)를 타고 새벽 다섯시 반쯤에 출발했다. 베스도 장을 볼 일이 있어서 함께 탔다. 마지막에는 배낭 여행을 하는 외국인 서너명도 타서 배는 사람들로 꽉찼다. 100페소 정도로 저렴한 배였는데 주민들은 그것보다도 더 적게 내는 듯 했다. 섬에서 육지는 가까워 보여도 한참을 가야 한다. 사방이 깜깜했다가 갑자기 밝아졌다. 해가 뜨는 순간이 해가 지는 순간만큼 아름다운지 미처 알지못했다. 그건 아마도 해가 뜰 때 깨어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클레이언에 도착하니 세상이 환해졌다. 베스와 인사를 하고 버스를(버스라고 해봤자 지프니)타고 탁빌라란으로 향했다. 매연을 잔뜩 마시면서 졸리비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먹었다. 달달한 스파게티와 짠 치킨, 원두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드디어 섬생활이 끝났다는 것이 실감났다.
2016.2.15
37,
섬에서 하루 세끼를 먹는 건 무리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루 두 끼면 충분한데 민박 주인의 기대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세끼를 먹다보니 소화불량에 걸려버렸다. 다음부터는 식사를 제외하고 방만 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줄일 것. 과도한 걸 줄일 것. 그러기 위해 섬에 들어왔으니까. 전기, 물, 음식…. 조금씩 줄이고 우리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들(바다, 바람, 나무)을 즐기기 위해 시간을 더 써야 한다.
2016.2.20
38.
배를 타고 탁빌라란에서 세부로 향했다. 세부 항구에서 숙소까지 걸어갔다. 택시를 타면 그만인데도 가깝다는 이유로 시도해 본 것이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길. 매연과 거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길거리 음식과 상점들. 그 중에 Chow King이라는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중국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 숙소에 체크인 했다. 주변이 대학가라 분위기는 시내와 사뭇 달랐다. 대학생도 교복을 입고 다녀서 어린 아이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숙생들을 위한 원룸 건물이 즐비했다. 과일을 파는 노점상, 빵가게, 피시방, 저렴한 식당, 그리고 세븐 일레븐. 치킨집을 지나치면서 문득 베스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그 집에서 먹은 닭은 슈퍼에서 산 닭이 아니라 직접 잡은 닭이었다. 베스는 슈퍼에서 사먹는 닭은 맛이 없다고 했다. 여기서 파는 닭은 모두 슈퍼에서 파는 거겠지. 베스의 집에서 먹은 생선도 다 그쪽 바다에서 잡은 것이었다. 이제는 정체 불명의 대량 생산된 음식을 먹게 되겠지.